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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것이다. 계속 질문을 이어가 보자. 인간이면 누구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확실히 그렇고 말고! 모든 굴도 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잠깐, 여기서 몇 사람은 의견이 갈린다. 모든 굴이 다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건 당연하다. 그것도 생명을 가진 존재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그럼 좋다. 그러 면 홍당무는 어 떤가? 모든 홍당무는 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

음. 에, 그러니까 원래는 되레 그렇지가 … 않아. 즉 흥당무그자체로는그 럴 가치가 있다고 하겠지만, 그 많은 홍당무를 모조리 다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개개의 고래는? 잠깐. 조금만 더 굴이나 홍당무 차원에 머물도록 하자. 초미 세플랑크톤과 미소플랑크톤처럼 극히 작은 생명체들은 정확히 동물이나 식물에 귀속시킬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음을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동물들과 식물들은 공통 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단세포생물을 나눠보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키 기 위해서다.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어쩌면 열수분출구 가장자리의 황산동 기포(Kupfersiilfatbliischen)에서 유래하고, 그에 따라 같은 엄마를 가진다는 점 이다. 홍당무 역시도 살아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런 이유로 홍당무를 먹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반박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많은 생물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도 다른 것들 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우리의 무신경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따져보는 것 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주 철저하게 윤리적인 측면 만을 강조하려 한다면, 우리는 인류를 잘못 발전된 종으로 등급을 매길 수밖 에 없을 테고 우리 자신조차도 프로그램에서 빼버려야만 할 것이다. 동물들 도 그들이 다른 동물이나 혹은 식물을 먹는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는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엄밀하게 따지자면 성스러운 미소를 띤 채 굶어 죽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소회향(小商香. Dill)282)도 더는 절인 청어를 넣은 빵 양념으로 사용되는 일이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런 생각은 인간에게 죄 책감을 갖게 하면서도 동시에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 을 모조리 박탈하는 불행한 생각이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태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논의의 진전은 없다. 다르게 접근해 보자. 즉 다음과 같 은 사항들에 우리가 합의하는 것이다. 첫째, 살기 위해서 그리고 생존을 위 해서는 필요한 것이면 뭐든지 먹을 수 있다. 둘째,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이 아 니더라도 사람들이 즐겨 먹을 수 있다. 셋째, 먹기 위해서 어떤 생명체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 넷째, 현존 수량을 과도하게 고갈 시키는 것을 삼가서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미연에 방지한다. 다섯째, 고등 생명체와 하둥 생명체 사이에는 이들을 나눠놓는 일종의 경계와 같은 것이

282) 미나리과의 한해산이푼로 향이 상배 허브시웅로 많이 쓰이며 특히 비린내든 없애는 요리에 쓰인다. 우리나라에 서는 한약재로도 사용되어 왔다. 영어멍은 딜이며 학명은 이다.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는 가뜩이나 아주 까다로운 논점이다. 이 개념들 때 문에 최근에 많은 동물학대 행위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몇몇 진화생물학자와 동물행동학자들은 비록 명확한 것은 아닐 지라도 이러한 경계를 알아냈다고 믿는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동물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증거가 실험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다. 그 개체가 저라는 걸 아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하나의 자립적인 개체로서 인지하며 자 신의 현존을 성찰한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한 가장 잘 알려진 실험은 바로 ‘거울 테스트’ 이다. 거의 모든 동물은 거울에 비치는 제 자신을 인식하지 못 한다. 그러나 몇몇 원숭이, 병코돌고래나 다른 돌고래 및 범고래들은 그럴 줄 안다. 많은 생물학자들은 바로 이 점이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가 하 는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고 여긴다. 그것은 바로 인지적이고 자기 의식적인 사고이며,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자신을 다른 상태에 빠지게 해서 그것들과 공감하고 저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출 줄 아는 소질인 감정이입까지도 해 당된다. 이런 능력을가지고 있기에 인간은분명 모든 종의 정점의 자리를차 지한다. 



우리 인간은 어느 정도 의사결정의 자유를 누리지만(하지만 뇌 연구자 들은 오늘날 그 점에 대해서까지도 의문을 제기한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동물들은 미리 정해진 행동패턴을 무의식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아 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 다행스러움, 슬픔, 분노와 같은 정서 상태는 반드시 인지작용이나 감정이입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니다. 동물들이 데카르트 추종자들이 말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 러나 아주 적은 수의 동물들은 공감할 줄 아는 소질이 있으며, 이는 아주 큰 차이점이 된다. 공감의 능력에서 이번에는 책임의 의무란 것으로 옮겨가 보자. 양자는 불 가분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책임감이 충만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신중하 게 헤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독단주의라든가 무조건적인 광신, 확 정적인 긍정 혹은 부정의 입장과는 합치될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사태를 차별화하여 고찰하는 노력을, 그리고 매번 새로이 다시 한번 시험해보는 노 력을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그때그때 즉흥적인 결정을 내리는 이는 분명 더 힘겨운 생활을 영위한다. 


이러한 생활에 대한 좋은 대처는 책임감을 가지는 일일 것이고. 이렇게 하면 자기주장도 잘 할 수 있다.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 은, 설사 필요할 경우엔 동물을 죽여야 한다 하더라도 환경에 대해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고래잡이의 오랜 전통을 지닌 캐나다의 마카족(Makah) 인디언은 고래를 선물이라 간주하고 그 희생에 감사하며 사냥하기 전의 채 비로 정화의 의식을 치른다. 



한 생물체를 숭배하면서 동시에 죽인다는 것이 현대사회에서는 모순된다고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마카족의 관점에서 보더 라도 바로 그런 똑같은 일이 의식된다. 백인 이주자들이 북아메리카의 들소 를 달리는 기차 위에서 순전히 재미로 쏴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인디언의 원칙을 짓밞아버렸다. 그리고 그 일로 인디언들의 경멸을 받았던 것이다.


에식스 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생명체로서 겪을까 말까 한 온갖 단계 의 상황들을 죄다 겪어냈다. 처음에 그들이 출항을 한 것은 동물들을 죽이기 위해서 였는데, 당시 그들은 이 동물들도 살 권리가 있다는 식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고래사냥은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아가도록 도와주 는 일종의 업무였다. 물론 고래잡이들 중에도 이 포유동물을 단순히 헤엄쳐 다니는 고래기름 저장고만이 아닌 그 이상으로 간주하거나, 그들의 아름다 움을 놀라워한다든지 또는 깊고 황량한 바다 속에서 이 동물은 무엇을 느낄 까 하고 스스로 의문에 잠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규칙은 명백했다. 고래는 동물이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