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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고기다

인간은 고기다


선원들의 마음속에선 유령에라도 홀린 둣 섬뜩한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한다. 이 무시무시한 생각 때문에 선원들은 결국 격렬한 말싸움까지 벌 이게 된다. 그렇지만 그 결론은, 비극적인 에식스 호의 이야기에 몰두했던 심 리학자 쥐트펠트 박사가 설 명하는 것처 럼 “인간은 고기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사람들 눈앞에 갑자기 100 내지 120킬로그램의 고기가 놓이게 되면, 금세 먹을 생각부터 나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기력을 소진하여 사망에 이른 사람만 먹는다. 그렇지만 선원들 은 집요했다. 살려고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이 새로운 식량자원도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난파당한 에식스 호를 떠난 지 78일이 되는 날, 몇몇 선 원이 새로운 제안을 내어놓는다. 살아남은 자들이 후에 진술한 것에 의하면, 일체의 기독교적 기준을 버 리기로 결정을 내 린 것이다. 폴라드는 특히 추첨 에서 자신의 사촌이 당첨 되자 분노와 고통으로 날뛴다. 그러나 결국 그도 표 결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고, 선택된 자는一자신의 운명에 동의하는 상태 에서一살해당하여 먹힌다. 훗날 오웬 체이스는, 이 날 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며 신의 질서도 전복되어 버린 것이라는 말을 한다.


1821 년 2월 18일 표류는 끝이 났다. 체이스의 보트가 먼저, 그리고 그 다음 으로 폴라드의 보트가 남아메리카의 해변에 도달한다. 몇 달 후 한 척의 배가 핸더슨 섬으로 가서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구조한다. 이 끔찍한 사건은 폴라드와 체이스가 죽는 날까지 이들을 따라다니며 짐이 된다. 이 중 한사람 은 계속되는 불행에 시달리다가 낸터킷의 등대지기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체이스는 포경업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져 산 속에 먹을거 리를 쌓아두고서 말년을 보낸다. 2006년의 시점에서 고래에 대해 쓴다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하고 나는 오랜 시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왔다. 그들을 계속해서 신비화하 여 더 잘 보호받도록 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 존재의 참모습에 가까이 다가 가게 해야 할까? 물론 이러면 오히려 그들의 신비성을 벗겨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그들의 현재 수량이 관심을 끌까? 고래란 동물의 대표적인 종들마 다 낱낱이 그 면모를 다 그려 보이는 것이 그들의 인상적인 다양성을 나타내 주는 데 도움이 될까? 사람들은 늘 그랬듯이 일본이나 노르웨이를 비난할 까. 아니면 애써 균형과 관용을 주장할까? (덧불여 두건대, 고래잡이의 권리를 개 진하는 다른 민족들도 상당수가 존재한다. 인디언과 이누이트 족도 그런 민족이다.)



나는 결국 거의 200년이나 된 오래전 이야기를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왜 냐하면 그 이야기에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들이 얼마간 숨겨져 있기 때문이 다. 이 진실이란 다름이 아니 라 환경 여하에 따라 우리는 누구나 사냥감, 즉 단순한 먹을거 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사냥꾼이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고래사냥의 완전한 금지를 관철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를 그 모든 윤리적이고 생태학적인 한계선을 다 도외시해버린 채 살해한다거나, 혹은 경제 핑계를 대면서 일체의 법적 유예조치를 피해가며 무효화시킨다는 것은 범죄행위다. 


우리가 고래에 관하여 다시 한번 완전히 새롭게 접근하 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은 한편으로 데카르트주의의 무지라는 쓸데없는 부 담에서 자유로운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색적이고 신비한 것을 지나치 게 과장하려는 경향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우리가 바다포유동물을 위해주는 것은 결코 냉정하게 이익만 챙기려는 생각이나 혹은 사이비종교처럼 숭배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신성시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도 권할 만한 일이 못 된다. 범고래나 병코돌고래 (TiimmlerF81)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있는 침팬지는 그렇게까지 양극화되지 는 않아서, 절멸의 가장자리까지 내몰리지도 않으며 전율과 경외심을 수반 하며 관찰당하지도 않는다. 비육우의 두 뿔 사이 에 세상의 근원에 관한 은밀 한 지식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그래서 녀석들이 스테이크나 가죽재킷으로 가공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흔히 돼지를 대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경멸은 고 래가 고래잡이들한테 당하는 정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 의문이 들거니와, 대체 이 포유동물은 뭘 잘못했기에 가장 야만적인 의도나 가장 고귀한 의도의 노리개 감이 되어버 린 것일까? 또 뭣 때문에 모두가 제 입맛에 맞게 이 녀석들에게 점프로 링을 통과하는 묘기를 부리도록 하는 것 일까?


우리가 아주 멀고 먼 옛날로 되돌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파키세투 스나 암불로세투스가 눈앞에 있음을 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래가 우주 선을 타고 불쑥 나타난 녀석이 아니라 터줏대감처럼 육지에서 살아온 녀석, 즉 짐승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의 과거로 눈을 돌려 보면 우리는 우리 원조상인 루르히를 만나게 된다一역시 대단한 지능을 가진 녀석은 아 니었다. 우리 인간이 경쟁을 해야 했음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고래보다 지능이 높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닌 동물적인 유산을 부정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고래는 분명 우리보다 더 동물적이다. 이는 녀 석들의 정해진 대응방식이나 먹이를 먹는 습관 및 여타의 관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중 범고래 같은 몇몇 고래들은 지능이 비교적 높다고 할 수도 있어서 , 어쩌면 초창기 인간의 지능에 비교될 정도는 된다고 하겠다. 



그럼 우리는 경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까’? 고래도 많은 동물들이나 마찬가든고래 가운데 제일 큰 것으로 우리만로는 요즈음 큰든 고래라고도 반딘다. 독인어로는 크고 작은 것은 다 갇이 가리키기도 하나. 작은 것은 보봉 쇠돌고래(Sdweimwalc. 왜시고래라는 의미임)라 부믄다. 학명은 TmW)pS tnm- CZI/MS이다. 지일 수밖에 없어서 닭처럼 죽여도 무방하다고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는 녀석을 얼마나 인간적 = 대해야 할까? 또한 자신과 다름없 이 살아있는 생명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으로 내몰아가는 인간은 실제로 얼마나 동물적인가?


우리는 다시금 한 가지 보편적인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곧, 자연에서는 모든 경계지점들이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누구를 또는 무엇을 죽여 도 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진부한 것이 고, 심지어 허위이다. 우리는 우리의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먹이치우는 잡식동물(Allesfresser)인데다, 그 뇌는 불편한 질문을 받더라도 잘 마무리하면서 중분히 사고를 거친 후에 완전하 지는 않더라고 대강의 지혜로운 결단을 내릴 줄도 알만큼 충분히 발달되어 있다. 우리는 결코 진실로 이성적인 해결책에는 다다르지는 못할 것이다. 왜 냐하면 우리에게는 감정이라는 장치가 있고, 또 그것이 개입하는 것도 당연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자기 고유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치를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 개인적으로는 채식주의자들을 존중한다. 육 식을 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신념에 부응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의당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용인하지 않는다면 단 하 나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약60억 명의 사람들을순전히 채식만으로 부양 하려면 추가로 농업용 지구와 같은 행성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지 하는 문 제도 채식주의자들의 선언문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른 편에서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일테면 아직까지도 내가 잘 모르겠는 것들이 있는데, 나무는 도 끼가 제 껍질 속으로 찍혀 들어올 때 어떤 느낌을 가질지, 그리고 샐러드 재 료는 깨끗하게 씻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할지, 홍당무는 잘게 저며지며 썰린다 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 버섯은 버섯파스타에 대해 뭔 생각을 할지 둥등과 같은 궁금함이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식물이건 동물이건 일단 일정한 만 큼의 생명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고서는 우리가 이들 생명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결코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생존은 그다지 다른 유기체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송로버섯mtiffel)이나 굴 같은 유기체를 먹어 댄다. 하지만 나는 국제적인 굴 모라토리엄 같은 것은 기억에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누군가 이 놀라운 동물 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들은 적이 없다. 통째로 전체를 다루기 엔 이미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어쩌 면 차근차근 짚어가며 이 문제에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종일까? 그렇다. 홍당무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종일까? 그것도 어쨌든 분명하다. 그러면 굴은? 그것도 틀림없이 그렇다. 그 럼 고래는? 그거야 뻔하지, 바로 고래야 말로 정말 보호할 가치가 있다. 그건 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다!